지학순 주교의 삶

"정의의 실천 없이 평화는 절대로 올 수 없습니다." (지학순 주교 사목교서 중에서)


고 지학순 주교 (1921-93)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으로 있던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하여 구속되고 장기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양심선언에서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조작된 것이므로 무효'라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조직되었고,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정의구현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셨으며, 민주화운동과 정의평화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3차 공판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으나,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사제들과 학생, 시민들의 노력으로 구속집행이 정지되어 구속 7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800여명의 환영 인파가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맞이했다. 다음날 환영 미사에서 지학순 주교는 "부도적을 질책함은 교회의 의무"라며 진리와 정의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역설하였다.


1921년 9월 9일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청학동에서 아버지 지태린과 어머니 김태길 슬하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3월 서울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고 김수환 추기경과 동문으로 만나고

1943년 한경남도에 있는 덕원신학교에 편입하여 평생 지기인 윤공희와 김남수를 만난다.

1950년 전쟁중, 윤공희와 함께 월남을 감행해 가톨릭신학대학에 편입, 사제의 길로 들어선다.

1952년 노기남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로마 프로파간다 대학에서  교회법으로 박사학위 취득. 귀국 후 청주교구장 비서, 가톨릭신학대 교수, 부산 초장동 성당 주임신부로 봉직한다.

1965년 원주교구 창설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주교 서품을 받는다. 이후 진광중고등학교 설립, 신용협동조합 보금 육성, 원주 문화방송 설립 참여 등 지역 주민을 위한 다양한 일을 전개한다.

1971년 원동성당에서 '사회정의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가지며 군부정권과 정면으로 맞선다.

1974년 '유신헌법은 ...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하며 구속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어 지학순 주교 석방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1975년 3차 공판에서 유죄 선고.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 학생, 시민들의 노력으로 구속 집행이 정지되어 구속 7개월만에 출소한다.

1988년 원주 가톨릭사회복지회를 설립하는 등 불의한 사회 체제에서 그만큼 더 고난을 겪기 쉬운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1993년 3월 12일 선종하시고 배론 성지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주교님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농민과 광부, 가난한 노동자와 도시민 들을 위해 당신의 삶을 다 쓰고 가셨습니다. 평생을 권력과 싸우고, 옥에 갇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이 지금 말씀 하시는 듯합니다. "겁내지 마. 빛이 되어야 해. 똘똘 뭉쳐 싸워.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나라, 그게 하느님이 바라시는 나라야."    - 강우일, 제주교구 전 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자신의 사목 표어 "빛이 되어라(Fiat Lux)"를 살면서, 그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다른 빛을 이끌어 세상을 밝히는 참된 빛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다... 지학순 주교는 빛이 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 끊임없이 사회정의와 공동선의 실현을 통해 사회를 쇄신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세상 복음화를 위해 모든 사람과 함께 걸어갔다."   - 이진옥, 대구교구 사목연구소


[지학순 주교 연보(상세)]

1921년 9월 9일, 평안남도 중화군 청학리 출생

1934년 중화천주교회에서 메리놀선교회 소속 요셉 클먼(Josehp Calmon) 신부 로부터 영세(세례명 : 예언자 다니엘 Daniel) 

1936년 소신학교(小神學敎)격으로 서울 혜화동에 있는 동성상업학교(현 동성 고등학교)에 입학 

1943년 함경남도에 있는 가톨릭 덕원신학교 중등과 5학년에 편입학 

1948년 위 덕원신학교 신학과로 진학 

1949년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하여 덕원신학교가 폐쇄됨에 따라 학업이 중단 

1950년 전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와 함께 월남 

1950년 서울 가톨릭신학대학에 편입학 

1952년 전시 중 사제로 서품(부산 대청동성당에서 노기남 주교로부터 사제서 품) 

 1953년 청주 북문로성당의 보좌신부로 봉직 

1956년 로마에 있는 푸로파간다 대학에 유학하다(교회법 석박사 학위취득) 

1962년 부산 초장동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부임 

1965년 천주교 원주교구 창설과 함께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로 서품 

1967년 원주 시내에 진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육영 사업 

1970년 강원도 내 신용협동조합을 보급 육성 

1971년 천주교 원주교구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이끌고 원주시 원동성당에 서 3일 동안‘사회 정의 구현과 부정 부패 규탄대회’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추대 

1972년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전국협의회, 가톨릭정 의평화위원회, 가톨릭여성연합회, 가톨릭의사협의회 총재 주교 

1973년 노동자 교육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신구교 연합 ‘한국노동교육협의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 

 1973년 서울 YMCA에서 반독재 부정 부패를 규탄하는 ‘지식인 선언’에 서명 참여 

1974년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 검찰 조사 후 후암동에 있는 동생 지학삼의 집으로 주거 제한 

1974년 7월 23일 아침 “유신 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 보 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내용의 양심 선언과 사건과 관 련된 비망록을 내외신 기자와 신자들 앞에서 발표하여 이 날 12 시 15분 중앙정보부에 연행 8월 9일, 3회차 공판에서 징역 15년 자격 정지 15년 구형에 이 어서 징역 15년 자격 정지 15년의 형을 선고 9월 24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원주 원동성당에서 결성되고 9월 26일 제 1차 시국 선언이 명동성당 기도회에서 발표됨

1975년 2월 17일, 구속 집행 정지로 8백여 명의 환영 인파 속에 서울구치소 출감 

1975년 2월 18일, 명동성당에서의 환영미사에서 “부도덕에 대한 질책은 교회의 의무요 진리운동”이라는 내용의 강론 

1976년 명동성당에서 “한국 교회의 위기와 그 극복”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면 서 독재 권력에 맞서기 위한 사랑의 연합운동을 제창 

1977년 3.1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윤보선 씨 등과 ‘민주 구국 헌장’을 발표

1978년 신구교의 활동 단체들의 협의 기관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제3대 회장

1979년 Y.H. 노동자들의 신민당 당사 농성 사건과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으 로 수난 당하고 있는 시기에 영등포 산업선교회관에서 「한국교 회산업선교협의회」가 주최한 신구교 연합 기도회에서 “노동자 농민의 인권은 보장되어야 하고 Y.H 사건과 오원춘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는 요지의 강론 

1980년 강원도 사북읍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어용 노조 간부의 추방과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집단 항거 사태 이후 구속된 노동자들을 위해 가족들을 대신하여 변호사 4명을 선임해 주고 가족들의 생활을 보살핌 

1981년 원풍모방(서울 대림동 소재) 노동자들이 모금한 5,200만원을 희사 받아 이를 기금으로 하여 ‘한국근로자 복지협의회’(이사장 지학순)를 조직하여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교육을 통한 의식 개발 에 힘씀 

1982년 원주 가톨릭센터 내에 ‘가톨릭의원’을 개설, 시내 빈민 지역의 결핵 환자 를 진료 4월 3일, 부산 미문화원 사건과 관련한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그들의 법률 구조를 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천주교 원주교구 주최로 개최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고문 철폐운동을 제창 

 1988년 사회복지법인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설립 

1993년 3월 12일 선종하시고 배론 성지 성직자 묘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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